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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특별 희년(Extraordinary Jubilee)의 발생 배경 탐구 : 1933년 그리고 1983년

특별 희년(Extraordinary Jubilee)**은 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이 전통적인 25년 주기의 희년 외에 추가로 선포하는 희년입니다. 이러한 특별 희년은 보통 교황이 특정한 영적 메시지를 전 세계 신자들에게 강조하고자 할 때 선포되었습니다.

 

1300년부터 선포된 이래로 3번의 특별 희년이 있었습니다. 그 의미는, 특정 해에 교황히 영적 메시지를 강조하고 싶은 것이 특별히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래 세 희년들의 발생 배경을 사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1933년 속죄의 희년 (Jubilee of the Redemption)
  • 1983년 구원의 희년 (Jubilee of Redemption)
  • 2015년 자비의 희년 (Jubilee of Mercy)

특별 희년(Extraordinary Jubilee)의 발생배경

1933년 그리고 1983년의 특별 희년

두 특별 희년의 시작점이 되는 1933년은 1900번째의 그리스도의 고난과 속죄의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이 계산은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즉, 수난, 십자가에서의 죽음, 부활)이 서기 33년경에 일어났다는 추측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1300년부터 희년은 계속 진행된 행사입니다만 왜 갑자기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가 특별 희년으로 정해진 걸까요?

이 주기를 특별히 기념하는 것을 처음 시행한 교황은 비오 11세로,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신앙적인 면을 강조한 설명만 찾을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이해하기 위해 그 당시의 지정학적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가톨릭의 불안한 관계

1933년 특별 희년은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선포되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독재 체제 아래 있었습니다. 무솔리니는 1922년 로마 진군 이후 권력을 장악하고, 1930년대 초반까지 독재적 권력을 공고히 다져왔습니다. 

  • 라테라노 조약(1929년): 무솔리니는 교황 비오 11세와의 협정을 통해 바티칸 시국을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공식 종교로 규정했습니다. 
  • 정치적 억압과 국가주의 강화: 무솔리니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며, 가톨릭 신앙을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 경제적 불안정: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적 위기가 심화하였고, 무솔리니는 대규모 공공사업과 민족주의 선전을 통해 지지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라테라노 조약 이전, 이탈리아는 가톨릭을 공식 종교로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이후, 새롭게 형성된 이탈리아 왕국은 세속 국가를 지향하며 종교와 국가를 분리하는 원칙을 따랐습니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바티칸을 독립된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교황은 이탈리아 왕국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행보였습니다. 다행히 1929년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 무솔리니와 교황청이 오랜 갈등을 약간 해소하였습니다. 

하지만, 1931년에 발간한 회칙에서 확인되듯이 이것만으로는 교황 비오 11세는 아직 파시스트 정권에 곱지 않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회칙의 내용을 아래 인용합니다.

 

우리는 [파시스트] 당 자체를 비난하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당의 강령이나 활동 중에서 가톨릭 교리와 가톨릭 실천에 어긋나고, 따라서 가톨릭의 명성과 신앙과 양립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지적하고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1931년 회칙 Non Abbiamo Bisogno 에서-

 

-2. 독일의 나치즘 부상

1933년은 독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이 해,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면서 나치 독재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 대공황의 여파: 독일은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적 파탄과 대량 실업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수출의 급감과 은행 붕괴로 인해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률은 30%에 달하는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독일 국민들은 극심한 빈곤과 생활고를 겪었고, 이러한 경제적 혼란은 급진 정치 세력의 부상을 촉진했습니다.
  •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인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제 위기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점점 불안정해졌습니다. 이런 정치적 혼란 속 1932년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고 다행히 히틀러는 대통령에 직선으로 당선되지 못하였나 독일 전체에 그의 나치당의 영향력을 명백히 확인하는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대통령은 파울 힌덴부르크는 정치적 안정을 위해 히틀러를 1933년 독일 총리로 임명하게 됩니다.
  • (2년 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총리인 히틀러는 독일을 집어삼키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고, 교황 비오 11세는 이러한 시대적 위기를 신앙과 도덕적 가치로 극복하고자 했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교황청은 1933년 특별 희년을 통해 신앙적 재확인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이벤트로 작용하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애석하게도 그런 염원과는 반대로 사태는 점점 심화되어 세계 2차대전으로 이어졌습니다.

 

1933년에 1900번째, 1983년에 1950번째를 기념하는 특별 희년을 보냈으니 2033년에도 지내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글이 많이 길어져 2015년 자비의 희년 (Jubilee of Mercy)은 다음 포스트에 남기겠습니다.